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문포 해전 (문단 편집) == 전개 == 1597년 3월 9일(음력), 거제도의 기문포(器門浦)[* 거제도 북부, 장문포~영등포 부근으로 추정.]에 왜선 3척과 왜병 20여명이 정박해 있다는 소리에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첫 출전했다. 서로 휴전기였기에 왜병들은 경계하지 않았으며, 원균이 [[항왜]]를 통해 술을 주겠다며 초청했기에 기꺼이 응해 배를 조선 측에 접선해 술을 받아갔다. 그런데 원균이 돌아가는 왜선에 지자총통을 쏘며 '''뒤통수를''' 감행했다.[* 다만 강화협상 중에도 [[제2차 진주성 전투]] 등 국지전은 있었다. 또한 이미 1월에 일본군이 대거 재상륙하며 협상이 파기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것도 깔끔히 완파라도 했으면 모르겠으나, 오히려 독기가 오른 왜선 3척이 달라붙으며 1척의 '''[[판옥선]]을 전쟁 최초로 빼앗겼다'''. 왜병들은 빼앗은 판옥선을 타고 북쪽 육지로 도주하려 했으나, 조선군이 추격하며 화포와 불화살을 쏘아 원래 우리 배였던 판옥선을 침몰시키고, 왜병 18명의 수급을 베었다. 이 과정에 '''조선군은 140명이나 죽어''' 피해가 더 컸다. 도원수 [[권율]]과 [[원균]]은 왜병의 수를 80명으로, 수급을 47명으로 '''뻥튀기까지 한''' 이 해전(?)의 승전보(?) 장계를 올리자 [[선조(조선)|선조]]는 기뻐하며 논공행상을 하려 했다. 하지만 김응서가 원균의 추악한 실태를 담은 장계를 [[비변사]]에 보내어 진상이 알려졌다. 김해 죽도에 있던 왜장 도요 시게모리가 김응서에게 엄연히 휴전중임에도 나무를 베기 위해 떠난 자기 부하들이 원균에게 몰살당했다는 항의를 보내온 것. '''심지어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15명, 32명의 왜병을 꾀어 죽였다는 것. 이에 선조조차 논공행상은 취소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